866. 애굽(Egypt)⑨- 제 3 중간기 리비아인 왕조, 앗수르(아시리아) 이집트 침략
(3) 제 3 중간기 22왕조 (BC 945년 ~ BC 715년) - 리비아인 왕조 - 부바스티스
① 마네토 기록 - 22왕조의 통치자들은
나일 강 삼각주 동부의 부바스티스(Bubastis) 출신.
cf) 부바스티스 = 비베셋((겔 30:17)
② 혈통이 리비아이므로 - ‘리비아 왕조’라 불림.
③ 100년 이상 - 이집트의 북부 통치.
④ 끊임없는 분쟁 - 22왕조 말기로 넘어가면서 -
※ 타니스( = 소안)와 부바스티스의 군주들과
테베를 지배하고 있던 친척들 사이에 - 분쟁이 끊이지 않음.
❶ BC 9세기 말 - 이집트 제 23왕조가 분리되어
이집트 제 25왕조에 통합될 때까지 - 분열을 겪음.
⇒ 테베의 왕족들이 -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
구스③( = 쿠시)의 왕을 끌어들임.
❷ 23 왕조 -
⒈ BC 9세기 초부터 - 하이집트의 22왕조로부터 독립.
⇒ 레온토폴리스, 나일 강 하류 삼각지의 중부에서부터
테베를 비롯한 상이집트 지역을 100년가량 다스림.
⒉ BC 9세기 말 - 이집트 제23왕조가 분리됨.
⇒ 이집트 제25왕조에 통합될 때까지 분열을 겪음.
1) 셰숑크 1세(Sheshonk Ⅰ) = 시삭 1세(Shishak Ⅰ)(BC 945 ~ BC 922)
① 솔로몬, 여로보암①, 르호보암 시대의 이집트 왕
② 다른 이름 -
❶ 셰숑크 1세(Sheshonk Ⅰ)
cf) ‘셰숑크’의 의미 - ‘아문의 사랑을 받는 Beloved of Amun’
※ 아문(Amun) = 레(Re) = 라(Ra, Rah)
❷ 시삭 1세(Shishak, שׁישׁק, Šîšaq) Ⅰ’(왕상 3:1, 왕상 9:16~24, 왕상 11:1)
❸ 솨산크 1세
③ 리비아 왕자 또는 왕족
ⅰ) 이집트 신왕국(New Kingdom)의 말기에 정착했던 -
※ 고대 리비아의 매쉬애쉬 (Meshwesh) 부족의 족장 계열의 자손.
ⅱ) 그의 선조는 - 리비아인으로서
신왕국 말기에 이집트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에 정착하였다.
④ 가족 -
ⅰ) 할아버지 - 셰숑크 - 마(Ma)의 대추장
ⅱ) 아버지 - 님로트 - 마(Ma)의 대추장
ⅲ) 어머니 - 텐트쉐페 - 마(Ma)의 대추장의 딸
⑤ 이집트 군대 사령관이 됨 - 21왕조 프수세네스 2세(Psusennes Ⅱ)의 부하.
⑥ 이집트 22왕조 - 리비아 왕조의 창시자.(BC 943 ~ BC 922년) - 21년 통치
※ 리비아 왕조는 - 대략 200여 년 동안이나 지속됨.
ⅰ) 이유 - 프수세네스 2세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.
cf) 프수세네스 2세가 - 아들이 없이 사망함.
ⅱ) 시삭은 - 즉위하기 전에 -
❶ 아버지의 마(Ma) 대추장 직을 - 이어받고,
❷ 이집트군 사령관과
파라오 프수센네스 2세의 사위가 되어 -
⇒ 파라오의 수석 고문역을 맡았다.
⑦ 건축물 - 델타, 멤피스, 헤라크레오폴리스, 테베에서 중요 건물들을 건축
cf) 주로 신전과 승전비들
⑧ 시삭의 통치하에 - 이집트는 제2의 전성시대를 맞이함.
cf) 업적은 - 카르낙에 위치한 부바스티스 입구에 새겨져 있다.
ⅰ) 즉위한 뒤 - 테베(Thebes)와 이집트 삼각주 타니스(Tanis)에 나누어져 있던
분파들을 통합하여 -
⇒ 다시 한번 - 통일 이집트를 이룩함.
cf) 테베 - 현대이름 - 룩소(Luxor)
성경 속 이름 - 노(No)
헬라식 이름 - 테베, 티바
ⅱ) 이를 위해 시삭은 -
❶ 1째 아들 오소르콘 1세의 - 혼인관계를 통해 - 이집트 통치를 강화하였고,
❷ 2째 아들 이우푸트에게 - 테베의 아문 최고 사제 직위와 상이집트 주지사를 -
※ 겸임하도록 함.
❸ 3째 아들 님로트를 - 중 이집트 헤라클레오폴리스의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.
ⅲ) 적극적인 외교 정책 - 레바논, 시리아( = 수리아), 필리스티아, 페니키아( = 베니게),
네게브, 이스라엘 등
ⅳ) 시삭의 이스라엘 침략은 - 성경에는 물론 이집트의 기록에도 남아있다.
Ⓐ 귀환 후 - 이집트 남쪽 테베에 있는
거대한 아문 대신전(great Temple of Amun) 앞에 - 축제 광장을 건설했다.
※ 유다와 이스라엘로부터의 약탈품을 사용.
Ⓑ 그 광장의 한쪽 벽면 위에 - 그의 팔레스타인 원정을 기념하는
양각 부조(relief)를 만들었다.
❶ 오른쪽에 - 이스라엘 사람이나 외국인들을 - 매질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.
cf) 시삭의 모습은 - 거의 파괴됨.
❷ 왼쪽 측면에 - 포로로 잡힌 도시들을 밧줄로 끌고 가는 -
※ 이집트의 주 신인 아문(Amun)이 묘사됨.
❸ 각 도시는 - 위쪽이 묶인 죄수와 함께
그 도시의 이름을 포함하는 타원형 테두리로 표현됨.
cf) 유다 지역의 이름들이 있는 부분은 - 거의 완전히 지워짐.
Ⓒ 므깃도의 한 장소에서 - 시삭의 기념비가 발견됨 - 자신의 승리를 기념함.
cf) 1926년 Oriental Institute이 발굴.
※ 남유다 르호보암 침략때 만들어짐.(BC 925년)
ⅴ) 그러나 - 내적인 불화, 경제 침체, 무능한 정치력 등의 원인으로 -
⇒ 수준 높은 왕조는 되지 못함.
ⅵ) 아들 오소르콘 1세가 - 왕위를 계승함.
⑨ 성경에 이름이 언급되는 - 최초의 이집트 왕.(왕상 11:40, 왕상 14:25, 대하 12:2 . . .)
cf) 이후에 - 느고 2세( = 네코 2세)(왕하 23:29)와
호브라(렘 44:30)가 나온다
⑩ 솔로몬으로부터 도망 온 - 여로보암①을 보호해 줌.(왕상 11:40)
ⅰ) 솔로몬이 - 여로보암①을 죽이려하여 - 여로보암①이 애굽으로 도망.
cf) 여로보암①의 반역(왕상 11:40)
⇒ 솔로몬이 - 여로보암①을 죽이려 함.
⇒ 여로보암①이 - 애굽 시삭에게 도망감.
Ⓐ 아히야①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- 승리를 확신한 여로보암①은
※ 솔로몬 왕을 죽이기 위해 - 성급히 반란을 일으켰다.
Ⓑ 이러므로 솔로몬이 - 여로보암①을 죽이려 하매 -
⇒ 여로보암①이 -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-
※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(왕상 11:40a)
Ⓒ 솔로몬이 죽기까지 - 애굽에 있으니라(왕상 11:40b)
ⅱ) 시삭 1세가 - 피난처를 제공함.(왕상 11:40)
⇒ 이스라엘 분단의 원인을 제공.
※ 이스라엘 분열은 - 이스라엘에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 있는
절호의 기회임.
ⅲ) 여로보암①이 북왕국을 건설했을 때 - 시삭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
⑪ 르호보암 5년에 - 이스라엘을 침략(왕상 14:25~26, 대하 12:3)
ⅰ) 침략 이유 - 여호와께 범죄, 여호와를 버림(대하 12:1~2, 대하 12:5)
Ⓐ 르호보암의 나라가 -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-
⇒ 그가 -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
⇒ 온 이스라엘이 - 본받은지라(대하 12:1)
Ⓑ 그들이 -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-
⇒ 르호보암 왕 제 5년에 - 애굽 왕 시삭이
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(대하 12:2)
ⅱ) 시삭 1세가 - 60,000의 정예군을 앞세워 - 한순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
성전과 왕궁을 약탈함.(대하 12:3~9, 왕상 14:25~26)
Ⓐ 그에게 - 병거가 1,200대요
- 마병이 - 60,000명이며
- 애굽에서 그와 함께 온 백성 - 곧 리비아와 숙과 구스③ 사람이
헤아릴 수 없이 많더라(대하 12:3)
Ⓑ 시삭이 -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빼앗고 -
⇒ 예루살렘에 이르니(대하 12:4)
ⅲ) 그때에 유다 방백들이 - 시삭의 일로 -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(대하 12:5a)
ⅳ) 선지자 스마야①가 -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-
※ 스마야① - “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-
※ “너희가 - 나를 버렸으므로
나도 - 너희를 버려 -
⇒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.” 하셨다.”
한지라(대하 12:5)
Ⓐ 이에 -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- 스스로 겸비하여 이르되 -
※ “여호와는 의로우시다!.” 하매(대하 12:6)
Ⓑ 여호와께서 - 그들이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(대하 12:7a)
Ⓒ 여호와의 말씀이 - 스마야①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-
※ 여호와 - “그들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-
⇒ 내가 - 멸하지 아니하고
저희를 조금 구원하여 -
※ 나의 노를 - 시삭의 손을 통하여
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.”
(대하 12:8)
cf) 의미 - 르호보암이 - 공물을 바칠 것을 약속.
⇒ 이스라엘은 - 이집트의 식민지가 됨.
ⅴ)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-
❶ 예루살렘을 - 치고(대하 12:9a)
❷ 여호와의 전 보물과
왕궁의 보물을 - 모두 빼앗고(대하 12:9b)
❸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- 빼앗은지라(대하 12:9c)
ⅵ) 르호보암 왕이 - 그 대신에 -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-
※ 궁문을 지키는 경호 책임자들의 - 손에 맡기매 (대하 12:10)
⇒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-
※ 경호하는 자가 -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
경호실로 도로 가져갔더라(대하 12:11)
ⅶ) 르호보암이 - 스스로 겸비하였고
-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 -
⇒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사 - 다 멸하지 아니하셨더라(대하 12:12)
ⅷ) 여로보암①이 북왕국을 건설했을 때 - 시삭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
⑫ 아들 오소르콘 1세(Osorkon Ⅰ)가 - 왕위를 계승함.
⑬ 죽음 - 무덤의 위치는 알 수 없음.
2) 오소르콘 4세(Osorkon Ⅳ)(BC 40 ~ BC 720) - 22왕조 마지막 왕 - ‘소’(?)
cf) 이집트 왕 소(So)는 누구인가에 대한 - 2가지 의견
⒈ 델타 왕조 제 24왕조의 테프나크테 1세(Tefnakte Ⅰ BC 727~BC 720)
⒉ 누비아 왕조 제 22왕조의 오소로콘 4세 (Osorokon IV BC 730~BC 713)
※ 제 22왕조가 - 지리적으로 이스라엘(팔레스틴)과 인접해 있었다.
시삭 때부터 친분이 있었으므로 -
⇒ 소를 - 오소로콘 4세라고 본다.
(4) 제 3 중간기 23왕조(BC 818년 ~ BC 715년) - 리비아 왕조 - 테베(룩소)
① 리비아 출신의 파라오들이 - 다스렸다.
② 22왕조와 병존.
※ 22왕조와 같은 기간에 존재
③ BC 9세기 초부터 - 하이집트의 22왕조로부터 독립.
⇒ 레온토폴리스, 나일 강 하류 삼각지의 중부에서부터
테베를 비롯한 상이집트 지역을 -
※ 약 100년가량 다스림.
④ BC 9세기 말 - 이집트 제23왕조가 분리됨.
⇒ 이집트 제25왕조에 통합될 때까지 분열을 겪음.
(5) 제 3 중간기 제 24 왕조 (BC 732~BC 720) - 리비아 왕조 – 사이스(Sais)
❶ 리비아 출신의 파라오들이 다스렸다.
❷ 22왕조(리비아 왕조)와 병존.
25 왕조(구스③ 왕조)와 병존
※ 22왕조와 같은 기간에 존재
❸ 23 왕조가 - BC 9세기 초부터 - 하이집트의 22왕조로부터 독립.
⇒ 레온토폴리스, 나일 강 하류 삼각지의 중부에서부터
테베를 비롯한 상이집트 지역을 -
※ 약 100년가량 다스림.
❹ BC 9세기 말 - 이집트 제23왕조가 분리됨.
⇒ 이집트 제25왕조에 통합될 때까지 분열을 겪음.
① 하이집트 통일
② 나일강 삼각주의 서부를 점령하던 리비아의 리부(Libu) 부족이 -
※ 사이스(Sais)에 자리를 잡고 - 파라오를 자칭.
.
1) 테프나크트 1세(Tefnakht)(BC732년 ~ BC 725년) - 애굽 왕 ‘소’
① 느고 1세( = 네코 1세)의 아버지
② 제 25왕조(구스③ 왕조) 피예와 - 전쟁(BC 734년)
ⅰ) 중부 이집트를 정복하고자 북진하다 - 피예와 싸움
ⅱ) 테프나크트가 - 대패함.
ⅲ) 피예에게 - 조공을 줌.
③ 블레셋 가사 왕 하눈이 - 망명 왔다가 돌아감.
ⅰ) 앗수르( = 아시리아)의 디글랏블레셋( = 불) 3세가 가사를 침략하자 -
⇒ 이집트로 망명함.
ⅱ) 테프나크트( 리비아 왕조)와 - 25왕조 피예(구스 왕조)의 전투.
⇒ 하눈은 - 다시 블레셋 가사로 돌아감.
Ⓐ 중부이집트를 정복하고자 북진하는 테프나크트와 - 피예의 싸움.
Ⓑ 테프나크트가 - 대패함.
⇒ 피예에게 - 조공을 바침.
ⅲ) 앗수르(앗시리아) 디글랏 빌레셀 3세 (Tiglath-pileser) ( = 불 Pul)
※ 디글랏 빌레셀 3세 = ‘앗수르 왕 불’(왕하 15:19)
Ⓐ 앗수르는 - 디글랏 빌레셀 3세(재위 BC 745~727년) 때 전성기를 맞았다.
Ⓑ 앗수르는 이집트에게 - 점점 위협적인 세력으로 부됨.
⇒ 이러한 상황은 - 이집트 구스③ 왕 피안키와 샤바카의 등장을 부추김.
④ 세력이 약해짐 - 앗수르의 사르곤③ 2세에게 -
※ 애굽의 변경 지역과 12 마리의 말을 내어주게 됨.
⑤ 북이스라엘 호세아① -
❶ 앗수르 살만에셀 5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- 이집트 소(So)에 구원 요청함.
(왕하 17:4)
❷ 결과 - 호세아①가 - 살만에셀 5세에게 조공을 바치게 됨.(왕하 17:4)
※ 북이스라엘의 호세아① 왕과 - 동맹 맺음.(BC 726 ~ BC 725년경)
cf) 이집트 왕 소(So)는 누구인가에 대한 - 2가지 의견
⒈ 델타 왕조 제 24왕조의 테프나크테 1세(Tefnakte Ⅰ BC 727~BC 720)(?)
⒉ 누비아 왕조 제 22왕조의 오소로콘 4세 (Osorokon IV BC 730~BC 713)(?)
※ 제 22왕조가 - 지리적으로 이스라엘(팔레스틴)과
인접해 있었다.
시삭 때부터 친분이 있었으므로 -
⇒ 소를 - 오소로콘 4세라고 본다.
ⅰ)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올라오니 -
⇒ 호세아①가 - 그에게 종이 되어 -
※ 조공을 드리더니(왕하 17:3)
ⅱ) 그가 -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-
⇒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-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
⇒ 앗수르 왕이 - 호세아①가 배반함을 보고
※ 그를 - 옥에 감금하여 두고(왕하 17:4)
ⅲ) 앗수르 왕이 올라와 -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-
※ 그 곳을 - 3 년간 에워쌌더라(왕하 17:5)
ⅳ) 북이스라엘 - 사르곤③ 2세에게 멸망당함(BC 721년)(왕하 17:6)
Ⓐ 호세아① 제 9년에(왕하 17:6a)
Ⓑ 앗수르 왕이 - 사마리아를 점령하고
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-
⇒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
여러 고을에 두었더라(왕하 17:6b)
2) 바켄레네프(Bakenrenef) = 복코리스(Bocchoris)(BC725년 ~ BC 720년)
① 누비아(구스③) 왕 샤바코에게 - 죽임 당함(BC 720)
② 군대 장관 레우가 - 앗수르의 사르곤③ 2세에 대패함.
(6) 제 3 중간기 제 25 왕조 (BC 747~656) - 구스③(Cush) 왕조 - 앗수르(앗시리아) 공격기
※ 구스③ = 에티오피오 = 수단 = 누비아
★참고 - 67. 구스③
❶ 제 24왕조(리비아 왕조) 와 25왕조(구스③ 왕조)는 - 같은 시기에 병립함.
❷ 앗수르( = 아시리아)의 공격 받음 - 디글랏빌레셀 3세( = 티글랏빌레셀 3세)
살만에셀 5세, 사르곤③ 2세
❸ 이집트 세력이 점점 약해져감 - ‘상한 갈대’가 됨.(사 36:6)
※ 사 36:6 - 보라!.
네가 - 애굽을 믿는도다
※ 그것은 -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
사람이 - 그것을 의지하면 - 손이 찔리리니
※ 애굽 왕 바로는 -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
이와 같으니라
① 구스③의 침략(BC 747)
ⅰ) 구스③(쿠시) 왕국에서 유래한 - 누비아( = 구스③ = 에티오피아 = 수단)인들이
이집트를 침략.
ⅱ) 원인 - 끊임없는 분쟁 -
※ 22왕조 말기로 넘어가며 - 타니스( = 소안)와 부바스티스의 군주들과
테베를 지배하고 있던 친척들 사이에
분쟁이 끊이지 않았었음.
⇒ 테베의 왕족들이 -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-
※ 구스의 왕을 끌어들임.
ⅲ) 결과 - 왕좌를 차지하고 25왕조를 세워 ⇒ BC 656년까지 다스림.
② 앗수르( = 아시리아)의 디글랏 빌레셀 3세의 침략
★참고 - 204. 디글랏빌레셀 3세
ⅰ) 타하르카(디르하가)의 통치와
그의 후계자 탄타 마니의 통치는 - 앗수르와 끊임없이 충돌.
ⅱ) 이집트는 3번에 걸쳐 - 앗수르( = 아시리아)의 공격을 받음(BC 671∼BC 664년)
⇒ 테베는 - 2번 점령됨.
ⅲ) 이집트 테베( = 노)와 멤피스( = 놉②)를 약탈(BC 664 년)
★참고 - 138. 놉②
1) 피예(Piye = 피안키 Piankhi)(BC752년 ~ BC 721년)
① 구스③ 왕조의 지방 호족 카흐타의 아들.
② 피예가 북으로 올라와 - 이집트를 정복하고 25왕조를 염.
ⅰ) 피예가 통치한 구③의 왕국은 - 작았지만 백성의 단결력이 강했다.
ⅱ) 군대는 - 잘 훈련되었고 막강한 조직력을 가졌다.
③ 이집트의 파라오를 존경하는 사제이자 왕.
ⅰ) 테베의 신인 아몬-레를 숭배하는 - 독실한 신자였음.
ⅱ) 이집트인들보다 더 정통적으로 - 고대 이집트 신앙을 고수했다.
ⅲ) 피예가 - 질서회복과 정통신앙의 복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
상부이집트로 왔을 때 -
⇒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음.
※ 오히려 상부이집트 수인 테베에서 -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.
④ 제 24왕조 테프나크트( 리비아 왕조)와 - 25왕조 피예(구스 왕조)의 전투.
ⅰ) 중부이집트를 정복하고자 북진하는 테프나크트와 - 피예의 싸움.
ⅱ) 테프나크트가 - 대패함.
⇒ 피예에게 - 조공을 바침.
⑤ 하부이집트 멤피스와 소군주들도 - 정복해감.
⑥ 상하 이집트를 통일후 - 수도인 나파타로 돌아감.
⑦ 당시 국제 상황
ⅰ) 앗수르 왕( = 아시리아 왕) 살만에셀 5세가 -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포위함.
Ⓐ 이유 - 호세아①가 - 앗수르 살만에셀 5세를 배반함
cf) 살만에셀 5세 때 - 호세아①로부터 이미 조공을 받았었음
Ⓑ 호세아①가 - 이집트 파라오 소(So) 테크나프트에게 사자들을 보냄.
⇒ 화가 난 살만에셀 5세는 - 3년 동안 사마리아를 포위함.
ⅱ) 앗수르( = 아시리아) 사르곤③ 2세 -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킴.(BC 721년)
ⅲ) 이집트 24왕조 테프나크트는 - 사르곤③ 2세에게 - 이집트의 변경 지역과
12 마리의 말을 내어줌.
2) 샤바카(Shabaka = 샤바코)(BC 721년 ~ BC 707년) - 이집트 재통일(BC 712년)
① 이집트 재통일(BC 712년)
② 피예(피안키)의 동생
③ 이집트 문명을 고스란히 받아들임 - 특히 이집트 신앙에 깊이 빠짐.
※ 이집트 신전 안의 경전을 – 돌에 새김(석경을 고안함)
3) 셰비쿠(Shebitku = 샤바트카)(BC 707년 ~ BC 690년)
① 피예( = 피안키)의 아들
② 지중해 해변 국가들의 서부 반란을 - 선동함.
⇒ 사르곤③ 2세가 죽은 후 - 앗수르( = 아시리아)가 동시다발적인 반란에
휩싸인 틈을 이용.(BC 705년)
③ 남유다 히스기야에게 - 원조군을 보냄(왕하 19:9~10, 사 37:9)
※ 동생 디르하가를 - 남유다 히스기야의 원정군으로 파견.
⇒ 앗수르 산헤립에게 패함.
★참고 - 497. 산헤립
4) 디르하가(= 타하르카 Taharqa)(BC 690년 ~ BC 664년) - 구스 왕조
① 히스기야시대의 애굽 왕 타하르카(Taharqa)(왕하 18:21, 사 36:6)
② 피이(피안키)의 아들
③ 애굽을 지배한 구스③(에디오피아)의 왕조이면서 - 동시에 애굽의 제 25대 왕조.
(BC 690년 ~ BC 664년)
ⅰ) 구스③ 왕조의 - 마지막 왕.
ⅱ) 흑인 파라오 왕조의 - 마지막 파라오
④ 유다 왕 히스기야와 앗수르 왕 산헤립의 통치 기간 중 - 애굽을 통치한 구스③의 왕.
⑤ 남유다 히스기야를 도움 - 그러나 앗수르 산헤립이 승리함.(BC 701)(왕하 19:9~10, 사 37:9)
ⅰ) 히스기야가 앗수르 산헤립에게 대항하는 것을 원조했으나 - 결국 패함.(왕하 19:9~10, 사 37:9)
※ 왕하 19:9 - 앗수르 왕은 - 구스 왕 디르하가가 당신과 싸우고자 나왔다 함을
듣고 -
⇒ 다시 히스기야에게 - 사자를 보내며
이르되
산헤립 - “너희는 - 유다의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-
※ “네가 믿는 네 하나님이 -
※ ”예루살렘을 - 앗수르 왕의 손에 넘기지
아니하겠다.”
하는 말에 - 속지 말라!.”(왕하 19:10)
ⅱ) 이사야는 - ❶ 애굽이 - 잔인한 군주의 손에 넘겨질 것이며,
❷ 포악한 왕이 - 애굽 사람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.(사 19:4)
cf) 이 예언은 - 아시리아 문서에 의해 확증됨.
※ 사 19:4 - 내가 - 애굽인을 - 잔인한 주인의 손에 붙이리니 -
⇒ 포학한 왕이 - 그들을 다스리리라
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
cf) 포악한 왕 - 산헤드립, 에살핫돈
ⅲ) 에살핫돈이 혼혈정책을 폄 -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사람들과 앗수르인들(스 4:2)
※ 스 4:2 -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-
※ 우리가 -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
⑥ 앗수르( = 아시리아)인들과 끊임없이 충돌함 - 그러나 모두 패배함.
★참고 - 880. 앗수르③
ⅰ) 산헤립( = 센나케립)에게 패배
Ⓐ 산헤립은 - 디르하가(티르하카)를 대항해 승리하긴 했다.
※ 그러나 이 전쟁으로 많은 손실을 입은채
앗수르로 돌아감.(왕하 19:35~36, 사 37:36~37)
Ⓑ 산헤립의 비문에 기록됨.
※ “짐이 직접 . . . 에티오피아 왕의 병거 모는 자들을 사로잡았다.”
cf) 에디오피아 왕 = 구스왕 = 구스 왕조
ⅱ) 엣살핫돈( = 에사르하돈)에게 패배
※ 산헤립의 막내아들 에살핫돈이 왕이 됨.
Ⓐ 이집트 군대의 최초 전투는 - 에살핫돈 재위 7년 때.
⇒ 이집트는 심각한 패배함.
⇒ 3년 뒤에 - 나일 삼각주에서 15일 동안 3차례의 전투
⇒ 멤피스는 - 항복하고,
디르하가(타하르가)는 - 구스③로 도망.(쫓겨남)
Ⓑ 에살핫돈은 - “이집트의 왕들의 왕”이란 칭호를 갖게 됨.
⇒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이 - 이집트 정복을 뽐냄.
※ “짐은 - 그 왕, 타하르카에게 활을 쏘아 - 5 차례나 부상을 입혔고,
그의 나라 전체를 - 다스렸다.”
Ⓒ 나중에 다시 권력을 잡아 - 에살핫돈을 자극하게 됨.
Ⓓ 앗수르( = 아시리아) 왕 에살핫돈의 죽음 - 반란을 진압하러 원정 가던 중 하란②에서.
Ⓔ 에살핫돈이 후계자 세움 -
❶ 죽기 전에 - 자기의 아들 아슈르바니팔을 황태자로 선언.
❷ 다른 아들 샤마시슘우킨을 - 바빌론의 왕으로 임명 함.
ⅲ) 앗수르바니팔( = 아슈르바니팔)에게 복종하다가 - 반역함 - 패배(BC 667년)
cf) 아슈르바니팔( = 아슈르바니팔 = 오스납발)
※ 산헤립(센나케리브)의 손자, 에살핫돈(스 4:2)의 아들.
★참고 - 884. 앗수르바니팔
Ⓐ 구스③(쿠시)의 왕이자 애굽의 왕인 디르하가가 -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킴.
Ⓑ 앗수르바니팔은 - 앗수르 군대를 보내어 – 멤피스( = 놉②)에서 곧 진압함.
Ⓒ 디르하가 - 구스③( = 쿠시)로 도망감.
Ⓓ 반란을 도왔던 이집트의 신하들은 - 모두 니느웨( = 니네베)로 붙잡아 감.
Ⓔ 파라오 느고 1세(네코 1세)를 - 이집트의 왕으로 세움.
⇒ 앗수르가 애굽을 지배함.
cf) 정복지에 그 지역 출신 왕을 세운다는 방침.
5) 탄타마니(Tantamani)(BC 664년 ~ BC 656년)
※ 수도 테베가 - 앗수르( = 아시리아)의 앗수르바니팔에 의해 정복됨
⇒ 구스③인에 의한 구스③ 25왕조 - 멸망
① 디르하가( = 타하르카)의 조카.
② 구스③에서 - 다시 이집트를 침범해 - 테베를 점령.(BC 664년)
③ 앗수르( = 아시리아) 아슈르바니팔( = 오스납발)의 공격
ⅰ) 아슈르바니팔은 -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 이집트를 공격.
⇒ 수도 테베가 - 잇수르바니팔에 의해 다시 정복됨
ⅱ) 대리 왕 세움
❶ 프삼티크 1세 - 이집트 사이스의 대리왕으로 세워짐
※ 바로 느고 1세의 아들
반란을 진압하던 중 - 대리왕 바로 느고 1세가 죽었기 때문.
❷ 느고 2세( = 네코 2세) - 이집트 아트리비스의 왕으로 세워짐.
④ 구스③( = 에디오피아)로 - 다시 쫓겨남.
※ 본래 수도 메로에로 쫓겨남.
⑤ 구스③( = 에디오피아) 나파타라는 곳에 - 다시 왕국을 세움.
⑥ 이집트 완전 멸망.
⇒ 구스③( = 누비아, 에티오피아, 수단)인의 -
※ 이집트 지배 끝남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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